
교양하는 마음, 그 첫 마음으로
배지연(대구대학교)
한국 현대문학을 전공 삼아 대학원에 진학한 지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동분서주하며 치열하게 공부했고, 빛나지는 않아도 여전히 문학 연구자의 길을 가고 있다. 비정규직이기는 하지만 문학과 글쓰기를 담당하는 교양강의 교수가 되어, 불안정하나마 대학 언저리에 터를 잡았다. 현대문학 연구자이면서 대학 교양 교육의 담당자, 이것이 현재 나의 위치이자 정체성이다. 누군가는 전공수업과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교양수업을 하찮게 여길 수도 있지만, 전공과 무관하게 문학/글쓰기에 매료되어 그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교양강의가 나는 더 좋다. 전공 교과목을 강의할 기회도 적었지만, 박사수료 후 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교양수업의 매력에 빠진 것이 현재의 나를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즈음 박사 논문의 주제를 최인훈 소설의 글쓰기 방식으로 잡은 것도 한몫했다. 독서광 최인훈은 메타인지적 차원에서 다양한 텍스트를 논평하거나 ‘다시-쓰기’하는 방식을 통해 독서와 쓰기의 영역을 확장하고, 문학 영역에 다층적 매체를 활용해 당대 문학 관습 너머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양한 텍스트와 매체 간의 연계를 시도해온 최인훈의 글쓰기 방식은 독서 이후 다양한 사고 과정을 거쳐 자기표현의 방식으로 맥락화되는 여러 교육 영역에 적용할 수 있다. 읽고 쓰는 행위가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자기 안으로 들여오는 창(窓)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교양수업을 하는 나 자신이 덩달아 뿌듯해지기도 했다.
<한국현대소설교육론>이나 <외국인 학생을 위한 한국문학특강>과 같은 전공과목이나 대학원 강의도 했지만, 박사과정 수료 이후 주로 맡은 강의는 <한국의 언어와 문학>, <문학과 사회>, <한국문학의 이해>, <대학 글쓰기>, <교양세미나> 등 교양 교과목이다. 이들 교과목은 한국문학이나 글쓰기를 매개로 개인이 살아가는 세계를 가늠하고 톺아보면서 지성을 갖춘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한다. (비)문학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자신이 속한 세계를 검토하고 그것을 글이나 여타 활동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학생들도 성장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만큼 교수자도 성장한다. 교양수업을 해온 그간의 경험들, 예컨대 강의를 통해 학생과 교수가 서로 관계 맺으며 성장해온 생생한 체험과 그 결과들이 교수자로서 내게 큰 자산이 되어왔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 날. 십여 년 전 삼월 첫 주, 첫 강의에 실수할까 걱정되어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캠퍼스를 많이도 서성거렸고, 강의 잘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한참 했다. 강의실에서 나는 ‘대접받고 싶은대로 대접하라’는 성서의 황금률을 제시하며, 우리의 수업을 그렇게 꾸려나가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시작된 수업에서 학생들은 교수가 자신들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과제와 글쓰기 활동을 거치며 교수와 학생 사이에 따뜻하고 끈끈한 무엇이 생기게 된다. 한 학기가 지나면, 교수님 덕분에 한국문학이 재밌게 읽힌다거나 글쓰기가 좀 더 수월해졌다는 강의 후기를 남기는 학생들. 종강 이후에도 몇몇 학생은 연락하여 안부를 전하며 고민을 나누기도 하는데, 10년이 넘도록 설날과 추석에 명절 인사를 보내는 기특한 학생도 있다. 14학번이던 그 친구는 그 이후 해마다 명절 인사를 보내왔는데, 입대와 전역, 대학 졸업과 대학원 진학 등 10년간의 행로와 안부도 같이 전했다. 오랫동안 품었던 교사의 꿈을 마침내 이루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이번 설날에 보냈다. 자기성찰 글쓰기를 하면서 그 꿈을 나눴던 터라 내 일처럼 기쁘다. 조만간 만나 새내기 교사를 마음껏 응원할 생각이다.
학생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행운은 ‘깜짝 선물’처럼 찾아온다. 교양강의에서는 흔치 않지만,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삶의 방향을 찾아갈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다. <한국문학의 이해> 수업에서 과제로 자전소설을 받은 적이 있는데, 심연에 묻혔던 어리고 상처받은 자아와 화해하게 되었다는 학생의 후기를 가슴 먹먹하게 읽은 적이 있다. 복학 후 방황하던 그 학생은 그 글을 쓰면서 남은 대학 생활을 방향을 다시 설정하게 되었다고 했다. 소설가 최인훈이 고등학교 작문 선생님께 신진소설가라는 칭찬을 받았듯이, 그 친구도 내게서 ‘한 편의 작품이 된 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대학 글쓰기> 수업을 듣고 작가가 된 학생도 있다.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메일로도 활발히 소통해온 그 친구는 작가 기질이 엿보인다는 내 격려에 힘입어 글 몇 편을 출판사에 보냈다고 했다. 종강 이후 몇 번의 메일을 주고받다가, 몇 년 뒤에 메일을 보내왔다.
배지연 교수님께,
안녕하세요 교수님. 2019학년도에 <대학 글쓰기> 수업을 수강했던 영어교육과 김보민입니다! 예전에 동기들과 점심 사주셨을 때 마지막으로 뵙고 그동안 한 번도 뵙지 못했네요… 그간 연락도 못 드려 죄송합니다!
교수님 수업 덕분에 출간계약을 하고 책을 쓰기 시작한 지 2년이 된 이번 달에 드디어 제 책이 출간되었어요. 제 책의 제목은 <당신의 어제가 나의 오늘을 만들고> 입니다! ㅎㅎ
코로나 때문에 탈고가 늦어지기도 했고, 책 한 권을 쓰는 일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더라구요 🙂 다행스럽게도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제 책을 좋아해 주셔서 교보문고, yes24, 네이버 북스에서 모두 에세이 부문 베스트셀러 차트에 올랐어요! (…중략…)
교수님의 <대학 글쓰기> 수업 덕분에 제가 작가라는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생각보다 정말 빨리 이룰 수 있었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항상 수강 신청할 때마다 교수님 수업을 꼭 한번 다시 듣고 싶었는데, 시간표가 맞지 않아서 듣지 못했네요. 교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새내기였을 적인데, 다음 학기면 졸업을 앞두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해요. 제 대학 생활에서 절대 잊히지 않을 ‘출간’이라는 도전을 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날이 쌀쌀해지고 있는데, 항상 건강 조심하시고 행복한 나날들만 가득하시길 바라요!
영어교육과 김보민 올림
여러 업무에 치여 메일을 제때 확인하지 못한 터라 김보민 작가의 이후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어느새 사회에 나가 한몫하고 있을 그에게 넌지시 뒤늦은 답신을 부치고 싶다. 이후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대학 글쓰기>를 수강할 후배들에게 작가가 된 그의 이야기를 나누며 글쓰기의 욕구와 동기를 충동해볼 터이다.
교양수업을 하며 가장 오랫동안 연락하고 지내는 학생이 있다. <대학 글쓰기>의 영역별 교과목이었던 <인문학 글쓰기>를 수강한 13학번 병민이. 그를 포함한 남학생 서넛이 친하게 다니면서 발표도 잘하고 과제도 성실히 제출했다. 자기 고향에 소재한 공기업에 취업해서 회사원으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꿈꾸던 그는 말하듯이 글을 풀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멋 부리지 않고 진솔하게 썼다고 그를 칭찬했는데, 그게 그 친구의 인생을 붙잡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병민이를 인문대 복도에서 자주 마주쳤다. 병민이는 글쓰기 교수의 칭찬을 상기하며 군에서 글을 꽤 많이 썼다고 한다. 졸업 무렵에는 그간의 글을 모아 독립출판으로 책을 냈다. <그림자로 철학하기>라는 그럴싸한 제목까지 붙여서.
그 무렵 나는 경북대학교에서 BK사업 연구교수로 재직하면서, 지역의 인문학 운동/교육 플랫폼을 지향하는 ‘대구경북인문학협동조합’의 운영위원을 맡고 있었다. <글 쓰는 수요일>이라는 시민 대상의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가끔은 작가 초청 북토크도 진행했다. 병민이와 친구들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지역의 다양한 시민들과 작가들을 만났고, 인생 선배들에게 진로 고민도 나눴다. ‘문송’(문과라서 송구하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인문대생의 진로가 어두웠던 시기, 병민이는 같은 대학 석박사 통합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다. 늦은 밤까지 연구실을 떠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어떤 희망을 읽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험한 길로 들어서려는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병민이가 잘 해내리라 기대하며, 힘껏 응원했다. 얼마 후 코로나 펜데믹이 덮쳤고, 나는 다른 대학의 연구소로 이직했다. 그 사이 병민이는 대학원에서 치열하게 공부했고, 여러 관계 속에서 고군분투했으리라. 교양수업 하러 학교에 왔다가 병민이를 다시 만났다. 박사 논문을 열심히 쓰는 중이라 했는데, 계절이 바뀐 어느 날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며 연락이 왔다. 멋쩍게 웃으며 내놓는 학위논문의 앞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배지연 교수님께,
교수님께 ******학과에 입학했다고 말씀드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졸업까지 했네요.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흐른 것 같습니다.
학부 1학년 때 들었던 <인문학 글쓰기> 수업에서 A+을 받은 것은 여전히 제게 좋은 기억입니다. 어떤 글이든 글을 쓸 때, 자신감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어느덧 2024년도 하반기를 앞두고 있네요.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안부를 여쭤볼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이 논문을 드립니다.
제자 김병민 올림
다음 학기에 박사가 된 그를 만났다. 졸업을 향해 매진했지만, 박사가 되고 보니 그 이후가 더 막막하다고 했다. 대학원 강의를 하기 위해서는 다른 전공 교수님들과의 관계에 좀 더 신경 써야 한다는 지도교수님의 말씀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박사 선배와의 갈등, 거기서 확장된 연구환경의 문제들.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며, 그간의 고생을 생각해서라도 조금만 더 힘내보자고 격려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도 이미 겪어본 일들을 그도 해내야 한다는 사실에 씁쓸했지만, 어쩌면 글쓰기 수업에서의 그 칭찬이 병민이의 ‘고생길’에 한몫했을 수도 있다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는 그에게서 비탄에 빠진 나의 숨겨둔 얼굴을 보았다. 전임교수 임용에 연달아 실패하며 상심했던 터라, 병민이의 시련은 나의 또 다른 판본처럼 여겨졌다. 성실하게 취업 준비해서 안정적인 공기업 회사원이 될 청년에게 내가 무슨 짓을 했던가. 연구와 교육이라는 빛나는 사명 뒤에는 좌절과 포기라는 쓰라린 아픔이 양날의 검처럼 함께 하고 있음을 알면서, 그 길을 가겠다는 제자를 말리지 못한 나 자신을 꾸짖었다.
몇 달이 지난 후, 병민이는 대학 강의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대신 자기 영역에서 쉼 없이 공부하여 그 결과물을 부지런히 생산하겠단다. 책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 발표된 성과들은 꼭 대학이 아니더라도 다른 장소에서 멋진 강연자로 서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당분간 많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잘 해보겠다며 환하게 웃는 병민이. ‘청출어람’이라 했던가. 그는 나보다 훨씬 깨어있고 앞서있다.
이전에 내가 마음으로 품었던 것을 병민이는 몸소 실천하려고 한다. 십여 년 전, 대학이라는 강고한 울타리를 넘어서 인문학으로 시민들과 소통하겠다는 그 마음으로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마음만으로 고군분투하다가 아직도 대학 언저리를 어정쩡하게 맴돌고 있는 나. 병민이는 또 한 번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대학의 교양 교육은 개인과 시민으로 성장해가는 인류사회의 일원으로서, 또 학문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능력과 지식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다. 교양 교육의 지향은 대학 바깥의 시민들에게도 열려있다. 지역에서 인문학협동조합을 만들 때 우리는 시민들과의 교양수업, 그 수업을 통해 상호교류하며 성장하기를 꿈꾸었다. 내가 십 년이 넘도록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병민이는 대학 밖에서 그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병민이를 보며, 나는 처음 강단에 섰던 그때, 그 마음을 떠올린다. 내가 교수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대접받고 싶듯이, 그런 마음으로 학생을 대하겠다고 결심하던 그 시절. 함께 꾸려갈 수업시간만큼은 모두가 성숙한 개인과 시민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던 그 마음. 그 시절의 나는 그들의 성장을 살펴볼 시간과 곁을 기꺼이 내주었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학생들 덕분에 지금까지 교양 교육의 담당자로 설 수 있었다. 교양강의를 해온 그 시간이 참 소중하고도 감사히 여겨진다. 대학 교육에서 교양강의는 정년을 보장받지 못한 비전임(혹은 비정년) 교수들이 처한 비루한 현실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강의를 시작했던 그 순간부터 ‘교양수업에 진심’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제 곧 개강이다. 3월을 맞은 캠퍼스는 학생들의 온기와 열정으로 들썩이겠다. 그 일렁이는 리듬을 타고 교수들도 채비할 시간이다. 아마도 새내기들은 호기심과 기대로 강의실 문을 열겠지. 그들을 따스하게 맞이할 ‘교양하는 마음’을 다시 꺼내어 곰팡이나 먼지가 쓸지 않았는지 살펴봐야겠다. 학생들과 함께 성장하자는 그 마음으로 시간과 곁을 내어주리라. ‘교양(교육)하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바로 그 마음으로. 라는 이명이 내 귀속을 강하게 후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