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대학의 민주ㆍ평등이 대한민국의 민주ㆍ평등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 생태 위기, 전쟁은 분리된 재난이 아니라 서로 얽혀 있습니다. 공론장은 플랫폼 자본과 알고리즘에 의해 쉽게 왜곡되고, 상시화된 기후 재난은 생명의 기반을 흔들며, 전쟁과 파시즘은 불안과 혐오를 또다시 동원합니다. 그 과정에서 개인들은 더욱 고립되고, 사회는 이윤과 속도만이 진리인 양 받들고 있습니다. 이런 복합적 위기는 인간에게 무엇을 공공선으로 삼고, 어떤 규범 아래 함께 살아갈 것인지 다시 묻습니다.
그렇기에 인문사회과학의 사회문화적ㆍ국가적 의의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우리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은 기술만능주의의 폭주를 경고하고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비판적 사고와 윤리적 판단의 토대를 지키고 재구성해왔습니다. 또 전쟁과 혐오에 맞서 취약한 인간과 생명을 위한 연대의 조건을 사유하고, 공동체가 스스로를 이해하며 미래를 설계하도록 하는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계속 싸워왔습니다. 일례로 지난 2024년 12월 3일 내란 이후 전국의 수많은 인문사회과학자들은 학교별ㆍ학회별로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거리로 나갔습니다. 한국 현대문학 연구자들도 2025년 1월 9일 “윤석열 탄핵을 촉구하는 한국문학 연구자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응원봉 대열에 힘을 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비정규직 교수ㆍ연구자들은 북풍한설을 맞으며 대학의 민주주의와 공공성, 그리고 처우개선을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비정규교수에 대한 처우와 복지 개선은 대학 교육과 지식 생산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사회적 과제이며, 고등교육의 질과 학생의 권리를 지키는 핵심 문제입니다. 또한 학술생태계의 재생산과 국가의 연구 역량을 지키는 올바른 길입니다. 대학 내부의 차별과 불평등이 시정되어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으면 대학이 민주주의의 요람으로서 기능할 수 없습니다.
1. 비정규교수ㆍ연구자 차별 폐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처한 현실은 여전히 열악합니다.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막무가내식 구조조정과 학과 통폐합 위기 속에서, 비정규직 교수 노동자의 노동 환경은 대한민국 노동법 기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전국 9만 7천여 명에 달하는 비전임교원과 비정년트랙 교수는 대학 교육의 70-80%를 담당합니다. 그러나 교원에 대한 복지와 연구비, 각종 학교 사업 참여 기회는 거의 정년트랙 전임교원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비정규교수의 기본적 권리와 학술 활동의 기회는 구조적으로 차단돼 있습니다. 또한 강의 준비 및 채점 부담이 유사한데도 대학들 사이에 많게는 약 4배 이상의 강의료 격차가 있습니다. 이러한 비정규직에 대한 불공정한 정책은 대학을 착취와 불평등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교육부는 대학에서의 비정규교수 직급 운영에 대한 관리 감독을 전면 강화하고, 관련 정부 기구는 대학 내 부당 노동 행위에 대한 차별을 조사하고 근절하게끔 조치해야 합니다.
1. 여성 연구자의 권리 신장과 출산ㆍ육아의 권리에 대한 보장
학령 인구 감소가 대학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상황에서 여성 연구자는 아직도 여러 면에서 차별과 배제를 겪고 있습니다. 이는 고등교육이 젠더ㆍ계급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고착시킬 위험이 있으며, ‘학령 인구 감소’를 우려하면서 정작 대학 내 노동자들의 출산ㆍ육아의 권리를 방기하는 모순을 낳고 있습니다. 고용의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대학 비정규직 교수의 열악한 노동 환경은 인구 절벽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하는 국가가 가장 먼저 살펴야 할 사안입니다. 근로기준법 제74조(임산부의 보호)에 따라 대학 비정규교수도 유급(90일 중 최초 60일)으로 출산 전후 휴가를 보장받아야 하지만, 대부분의 대학은 비정규교수에 대해 이 법을 공공연히 위배하고 있습니다. 교육부가 관련 부처와 함께 비정규교수의 출산 및 육아가 강의 배제나 계약 해지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관리ㆍ감독하고, 대학에 유급 출산 및 육아 휴가 제도를 의무화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1. 대학원생 연구 평가의 개선과 생활권 보장을 위한 요구
대학원생은 사회발전을 이끌 학문 연구의 주역이자 다음 세대 연구자입니다. 그 생존 조건이 무너지고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학술생태계 자체가 붕괴하고, 사회와 국가의 지식 인프라가 유지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대학원에 대한 재정 지원 정책은 성과 중심 경쟁 체계를 통해 대학원생을 단기적 실적 생산 인력으로만 위치 짓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사업단 중심 재원 배분과 정량 지표 중심 평가는 대학원생의 연구 주제를 시장화된 평가 기준에 종속시키고, 학습권과 노동권을 물적ㆍ상징적 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의 맥락에 가둡니다. 연구자로서 자신의 문제의식에 따라 장기적이고 비판적인 연구를 수행하면서 노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보장되지 않는 한, 대학원생에게 생존은 권리가 아니라 자본을 매개로 한 제도적 통제의 다른 이름일 뿐이며, 통제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한 자기 타협 과정에 불과하게 됩니다.
대학원생의 학습권·노동권·생존권 보장을 위해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은 사업단 성과 연동 재정 구조와 평가 체계 전반을 재설계해야 합니다. 또한 대학원생에게 최저 생계비 수준 이상의 ‘기본 연구비’를 직접 지급하는 제도를 법제화하고, 정량 실적 중심 평가 지표를 전면적으로 축소하고 질적 평가로 전환해야 합니다.
1. AI 학술 지식 학습 및 사용의 권리와 공공성 보장
생성형 AI 기술의 확산 속에서 연구자들의 학술 논문은 동의나 보상 없이 무분별하게 AI 학습 데이터로 도용되다시피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술 공동체는 이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입니다. 이번 한국현대문학자대회 제도팀이 17개 학술단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AI 관련 규정을 마련한 단체는 약 10%에 불과했고, 자신들이 발행한 논문의 AI 학습 데이터 활용 문제를 아예 논의조차 한 적 없는 단체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또한 논문 저자의 저작권 동의서에 AI 학습 관련 조항을 명시한 단체는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연구자의 저작권과 데이터 주권이 침해되고 있으나, 이를 인지하고 대응할 제도적 기반 자체가 부재한 현실입니다. 학술 지식ㆍ데이터에 대한 AI 학습·재사용 과정이 불투명하면 표절·출처 불명·허위 인용 같은 문제가 커지고, 학술생태계 전반의 신뢰가 흔들립니다. 학술 지식 생산의 국가적 주권과 공공성을 제도화하기 위해서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은 국내 학술지의 오픈액세스(OA) 전환을 위한 실질적 예산을 확보해야 합니다. 또한 「국가연구개발혁신법」 개정안을 조속히 통과시키고 연구 결과물이 정부 또는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공공 리포지터리에 기탁되도록 하여, 상용 DB 기업이 공공의 자산을 사유화하는 일을 막아야 합니다.
1. 비정규직과 대학원생 권익 향상이 국가와 사회를 위한 백년대계다
연구자는 연구노동을 통하여 노동자로서의 생존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할 권리를 갖습니다. 연구자의 권리는 교육을 국가의 백년대계로 삼아 예산을 조정하고 투입하는 국가 기구의 정책적 지원 속에서, 그리고 뜻있는 민간의 참여와 관심 속에서 실현될 수 있습니다. 교육부와 관련 정부 기관들은 연구자들이 안정적 연구 환경 속에서 공동체를 위한 지식을 생산하고 전수할 수 있도록 불공정한 제도를 과감히 개혁하고, 공적 지원을 확대해야 합니다.
정부 국가연구개발(R&D) 총예산 대비 인문사회 연구 예산 비중이 1%에 불과한 현실은 바뀌어야 합니다. AI 시대에 인문사회과학 연구 지원과 연구자의 권익 향상은 더욱 절실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대학과 학술장이 올바른 가치관과 비판적 사고 능력을 갖춘 시민을 양성하여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고, 지식의 공유 속에서 문화적 연속성과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여 국가와 사회발전을 도모하는 가장 안정적인 길입니다.
이에 우리는 더 굳건히 연대하여 대학과 학술장을 개혁해 나갈 것을 다시 다짐합니다. 이 선언에 더 많은 연구자ㆍ교육자와 단체들이 동참해 주길 바라며, 교육부와 관계 부처 그리고 한국연구재단에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1. 정부는 대학에서 비정규교수 직급에 대한 제반의 차별 행위를 조사·감독하고 부당 노동 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라.
1. 정부는 여성 연구자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고 비정규교수의 출산 및 육아가 강의 배제나 계약 해지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대학에 유급 출산 및 육아 휴가 제도를 강제하라.
1.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은 대학원생에게 최저 생계비 수준 이상의 ‘기본 연구 지원금’을 직접 지급하는 제도를 마련하라.
1.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은 AI 학습 학술 데이터 활용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담은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이를 관리·감독할 독립 기구를 설립하라.
2026년 3월 1일
한국현대문학자대회협의회, 연구자공제회, 연구자의집,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지식공유연대,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한국현대문학자대회의 취지에 전폭적으로 공감하며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