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하는 마음] 기획 연재 -1회-

[교양하는 마음] 에세이 대공개!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 믹스커피와 녹차 티백, 동료 강사의 뒷모습― 흔한 강사실의 모습이에요. 현대문학 연구자인 우리는 글을 읽고 쓰며 논쟁하던 자리에서 한 발짝 나와 대학 강의실의 교육자로 섭니다. 그리고는 강사로 진입하는 방법과 문턱들이 주는 자괴감, 왜 내 학문적 전문성은 일자리로 연결되지 못하는가, 이 대학은 나를 교육자로 인정해 주는 것이 맞을까, 질문 투성이가 되지요. 그런데 서로의 지식과 존재를 나누는 시간이 주는 투명한 아름다움이 있잖아요. 나는 교육보다 연구가 더 맞는 것 같아라고 자책하는 순간도 있지만 학생들이 웃어주어서 나의 부캐(보조 캐릭터)가 개그에 있었다라며 뿌듯해하는 순간도 많죠.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서로-성장의 그 많은 시간들… 

기억하시나요? 2025년 봄이 시작되기 전 열렸던 <제2회 한국현대문학자대회>에서는 연구와 함께 한국 현대문학연구자의 일상과 생활에 밀접하게 맞붙어 있는 ‘교양 교과’을 둘러싼 이야기를 해 보았죠. 전공수업이 아닌 교양수업은 한국현대문학 연구자들의 (현실적인) 주된 일터이자 대학과 학문 영역의 위계를 여실히 담아내 온 공간, 그리고 동시대의 인간됨을 성찰할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의 장이라고요. 그리고 대학에서 마주해 온 교양교육의 이야기를 에세이로 모집했습니다! 그 글들이 드디어 공개되어요. 말랑말랑함, 호러, 일상툰, 다큐멘터리, 정치물 등 모든 장르를 거느리고 개봉박두…!!  

첫 글로 2025년 <제2회 현대문학자대회>‘교양하는 마음’ 좌담에서 황종연선생님께서 나누어주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대학에서 교양교육이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학제와 교육 과정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일과 시행착오들이 있었는지를 담아 주셨어요. 우리의 고민이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었다는 것, ‘오래된 미래’처럼 교양과 교육에 대한 기초적인 질문들에 대해 답하고 문제제기하는 자리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해 주는 글이에요. 그럼 글 속으로 퐁당, 하시고 다음 에세이에서도 만나요. 


교양하는 마음

황종연 (동국대학교)

저는 ‘교양하는 마음’에 대해 뭔가 말하기에 적당한 사람이 아닐지 모릅니다. 교양도 부족하고 교양교육 경험도 일천합니다. 교양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대해 저는 상식 이상의 식견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2000년대 초엔가, 국어국문학회의 요청으로 교양교육으로서의 국문학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에 나가 발표하고 그 원고를 게재한 적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 글의 요지는 국민주의적 교육 이념을 넘어서 한국문학을 연구하고 교육하자는 제안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이 좌담회의 모두 발언을 해달라는 요청이 저한테 온 것은 제가 한국 현대문학 전공자이면서, 재직 대학에서 교양교육 전문 기관 설립 작업을 수행한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 모임의 주최 측에서는 그 경험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든 해주면 좋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용기를 내서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동국대 교양교육 기관 설립에 관여할 당시에 교양교육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 교양교육 체제를 만들고자 했는지 간단히 말씀드리는 것으로 발언의 임무를 대신하겠습니다. 

제가 동국대 교양교육제도 개편 과제를 처음 위임받았을 당시, 교양교육 주무 부서는 교무처였습니다. 다시 말해 교양교육은 각 학과에서 담당하는 전공교육과 달리 독립된 조직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교무처 산하에 교양교육실이라는 조직이 있었고, 실장 자리에는 교육학과 교수 한 사람이 기용되고 있었지만, 교양교육에 관한 모든 정책은 교무처 소관이었습니다. 저는 학교 당국의 요청에 따라 2005년에 신설된 교양교육원 초대 원장으로 부임해서 교양교육 프로그램 강화를 위한 몇 가지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이후 1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난 다음, 다시 학교 당국의 부름을 받아 교양교육원을 단과대학 수준으로 확대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현재 존재하고 있는 다르마칼리지를 2014년에 출범시켰고, 초대 학장으로 일했습니다.

제가 동국대의 교양교육 행정에 처음 관여했을 때 동국대는 국내의 다른 4년제 종합대학이 대체로 그랬듯이, ‘일반교양’과 ‘전공교육’이 병존하는 교육 체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반교양은 전공교육과 별개도 취급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가 교양교육이라고 부르고 있는 영역과 동일합니다. 그 병존 체제 하에서 일반교양은 대개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기초 과목으로 편성되었고, 그 기초 과목의 관리 책임은 대학 행정 당국이 지고 그 과목과 유관한 개별 학과들이 당국을 지원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보다 과거에는, 1970년대의 어느 시기였다고 기억됩니다만, 국립대를 비롯한 몇몇 대학들이 교양학부를 두어 일반교양 교육을 전담시키던 때가 있기도 했습니다.) 국어국문학과의 경우에는 ‘대학국어’나 ‘대학작문’ 같은 과목을 열어 교양교육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한국 대학의 일반교양과 전공교육 병존 체제는 미국식 고등교육 제도가 한국에 도입되면서 성립한 것입니다. 일반교양은 제너럴 에듀케이션(general education)과 개념상 뒤섞여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일반교양과 교양교육이 동일한 영역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근래 우리 학계에서는 교양교육과 제너럴 에듀케이션을 호환 가능한 어휘로 사용하는 경향이 현저합니다. 그 경향의 예는 교양교육 관련 학회나 기구 명칭의 영어 번역에 흔합니다. 일반교양과 전공교육이 병존하는 대학 교육 체제는 한국보다 앞서 일본에 수립되었습니다. 전후 일본에서 연합군 점령 하에 이루어진 교육제도 개혁 과정에서 전문교육과 함께 일반교양을 중시하는 대학 교과과정 설계가 장려되었습니다. 당시 교육제도 개혁을 주도한 도쿄제대 총장 난바라 시게루는 종래의 이른바 구제(舊制) 고교와 제국대학 출신자 같은 소수 엘리트 교양인을 육성하는 대신에 보다 넓은 계층의 사람들을 “선한 인간, 선한 시민”으로 양성하는 교육을 촉구했습니다. (苅部直, 『移りゆく「教養」』, NTT出版, 2007, pp. 166-177) 

제너럴 에듀케이션의 범주 내에서 일반교양은 학생들이 다방면에 걸쳐 학습 경험을 하면서 자신들의 전공 영역 너머로 지식을 확대하는 것을 중시합니다. 일반교양의 목표 중에는 다양한 학문 주제에 관한 기초 지식 습득과 함께 사고하고 소통하는 능력 증진이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개편 임무를 맡은 당시에 동국대의 일반교양 교육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제가 조사한 다른 몇몇 대학의 그것과 많든 적든 비슷하게, 대학 교육 내에서 비중이 초라할 정도로 적었을 뿐 아니라 정해진 그 나름의 원칙과 기준에 따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일반교양은 개별 학과의 전공 기초 지식을 평이하게 전달한다는 정도의 방침으로 운영되고 있는 듯했습니다. 저는 일반교양이라는 영역의 목적이 명확하게 설정되어야 하고 그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지도 이념(guiding ideas)에 따라 교과과정이 정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교양교육 행정에 관여하기 시작한 시기에는 다행스럽게도 좋은 선례가 하나둘 만들어지는 중이었습니다. 동국대 다르마 칼리지보다 3년 먼저 설립된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특히 고마운 참조 기준이었습니다. 저희 행정 그룹에서는 도정일 선생을 초청해서 교양교육의 이념과 제도에 관해 말씀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교양교육의 목적이라고 하면 교양이라는 그 핵심 어휘 자체의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양교육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국어 교양의 외부적 원천에 해당하는 독일어의 빌둥(Bildung), 영어의 컬처(culture)가 근대 대학 이념의 얼마나 두드러진 부분인가를 알고 있을 겁니다. 거칠게 말해서, 교양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인간성을 사람 각자가 자신의 개성 속에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도야하는 과정이자 그 과정을 통해 몸에 익힌 지적, 도덕적, 감성적 능력의 총화입니다.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문화를 통한 인간성으로의 향상”이라고 교양을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Hans-Georg Gadamer, Truth and Method, second and revised ed., trans. Joel Weinsheimer and Donald G. Marshall, Continuum, 1997, p. 10) 이 휴머니즘적 이념에 따르면 기능의 습득이나 부귀의 성취를 위한 수업의 축적이 아니라 인간성의 함양을 위한 과정 자체가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근대적 대학제도는 19세기 프로이센의 철학자 빌헬름 폰 훔볼트에 의해 창설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직업교육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지만 훔볼트는 그 수요의 압력에 대항했습니다. 교양을 중심 이념으로 하고, 교양 배양을 담당하는 철학부를 학부의 정점에 두는 대학제도를 만들려 했습니다. 그 결과가 1810년에 창설된 베를린대학입니다. 

훔볼트식 대학 이념은 20세기를 거치는 동안 시효가 지났습니다. 시장 경제의 발전에 부수된 문화 변동에 따라 직업교육을 말단으로 여기는 대학 교육이 성립하기 어렵게 되었음은 물론, 교양을 중시하는 문화의 폐해를 부정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휴머니즘적 교양 이념에 대한 불신은 그 이념에 대한 시민계급의 지지가 현저했던 근대 독일과 일본이 모두 파시즘 국가 체제를 낳으면서 결정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양 이념은 그저 폐기하면 그만일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시장의 요구에 들어맞는 단편적 지식과 기술의 배양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성 함양을 목표로 하는 교육 이념이라는 면에서 그것은 오히려 갱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후 일본 대학 교육의 기틀을 만든 난바라 시게루만 해도, 도쿄대 정치사상사 교수 가루베 다다시에 따르면, 교양을 위한 교육을 지지한 인물입니다. 난바루는 만인을 대상으로 시민 양성을 지향하는 미국의 제너럴 에듀케이션의 원칙과 유럽식 교양 이념의 차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 결과 일반교양과 전공교육 병존 체제가 만들어졌습니다. 

언제부턴가 인간성 함양이란 말은 그리 의미 있게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대학이 너나없이 인력 시장의 변덕에 휘둘리고 있는 형편이다 보니 턱없이 거창한 소리처럼 돼버렸습니다. 더욱이, 그 말의 근대적 개념화에 크게 기여한 서양 휴머니즘이 유럽 백인 남성의 자기중심주의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비판적 지식 사회의 상식처럼 통하는 요즘에 그 말은 친(親) 서양적 문화 엘리트의 페티시(fetish)에 불과하다는 조롱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입니다. 그러나 인간성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바는 불변의 인간 형질 같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오히려 자신의 존재 조건을 변화시켜 왔고 그러면서 동시에 그 자신을 변화시켜 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카를 마르크스 같은 휴머니즘의 호교론자가 아닌 사람들조차 강조했듯이, 인간은 고정된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성이라는 개념은 어떤 이데올로기의 기능이라기보다 휴머니즘적 인간 정의를 포함한 의미상의 모든 한정을 넘어서는 인간 가능성에 대한 지시라고 이해하는 편이 옳을 겁니다. 

따라서 인간성을 함양하는 교육이란 인간 사이에서 보편적이라고 여겨지는 이런저런 가치들을 학생의 마음속에 배양하는 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일로부터 나아가 학생들 자신이 마치 주어진 자연인 듯이 영위하고 있는 문화에 대해 반성하도록, 그 문화의 규정들 너머의 자신의 가능성을 탐구하도록 고무할 겁니다. 개인들의 인간성을 함양하는 일과 그들의 자유를 위한 능력을 향상시키는 일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한국 교양교육의 중요한 참조 기준 중 하나인 서양의 리버럴 아츠 에듀케이션(liberal arts education, 자유학예교육)을 보면 어떻습니까. 그 중심에 바로 자유의 이념이 있습니다. 리버럴 아츠 에듀케이션 또는 리버럴 에듀케이션의 리버럴은 사람이 태어나 자란 사회의 관습으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 교양교육이 육성해야 하는 인간은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일까요? 이것은 여기서 다루기 어려운 문제이기에 제가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주장 하나만 지목하겠습니다. 그것은 미국 리버럴 에듀케이션의 개혁 제안자인 마사 누스바움의 것입니다. 그녀는 서양 고전고대에 수립된 리버럴 에듀케이션을 대학 교육의 모델로 제안하면서 그 교육이 이상화한 세계시민을 대학 교육이 육성해야 하는 인간형으로 삼고 있습니다. 누스바움이 세계시민으로 뜻하는 바는 자신이 속한 인종, 젠더, 국가, 문화의 속박에서 벗어난 만인의 인간성으로 구성된 도덕 공동체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세계시민 교육은 인류 세계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려고 하면서도 인류가 공유하는 의미와 가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특수한 인종적, 젠더적, 문화적 정체성 주장에 동조하는 정체성 교육과 구별됩니다. (마사 C. 누스바움, 『인간성 수업』,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18.) 

저는 동국대 교양교육 개편에 두 번 관여했을 때 세계시민주의의 요구, 즉 다양한 문화에 대한 관용, 인류 공통의 역사에 대한 이해, 민주적 시민성의 추구 등과 같은 요구를 어떻게 하면 교과과정에 반영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두고 이리저리 궁리했습니다. 동국대의 교양교육 여건이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만족스러운 교과과정 수립은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여러 동료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실현 가능한 방안을 모색한 끝에, 세계시민주의적 관념이나 가치 중에서 주제를 골라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과목 (예컨대 인권 주제, 생태주의 주제) 그룹, 그리고 그 관념과 가치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는 책을 읽게 하는 과목 그룹, 두 그룹을 신설했습니다. 그리고 교양교육기관 소속으로 전임, 비전임교원이 임용되어 그 과목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제가 조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두 그룹 중 독서 과목 그룹입니다. 저는 미국 대학의 중핵교과과정(core curriculum)과 같은 독서 과목이 동국대 교양교육과정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철학과 역사’, ‘정치와 경제’, ‘자연과 기술’, ‘문화와 예술’ 네 영역을 두고—또한 동국대가 조계종 종립대학으로서 추구하는 교육 목표를 감안해서 ‘불교와 인간’이라는 영역도 아울러 두고—영역별로 교내의 유관 전공 교수들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통해 학생들에게 전체 또는 부분 읽기 과제로 부과할 책의 목록을 정했습니다. 어떤 책을 얼마나 읽혀야 하는가는 선정 협의 단계에서부터 까다로운 문제였고, 교과과정 시행 후에 강독용 책을 두고 가끔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동국대 학생들에게 단테의 『신곡』을 의무적으로 읽게 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위원회 내부의 논쟁,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다룬 교원이 경찰행정학과 학생으로부터 항의를 받은 사연 등은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다르마칼리지를 떠난 후 교양교육 프로그램에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이 중핵교과과정 구조는 그럭저럭 원형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끝으로, 한국 현대문학 전공자가 교양교육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한두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교양교육을 리버럴 에듀케이션, 자유교육이라고 이해한다면 그 교과과정을 위한 자료 중에서 문학작품은 당연히 중요합니다. 문학작품은 인간을 일반적이면서 또한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개인들의 생활을 그 사회적, 도덕적, 미적 국면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인식하게 하고,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 위에서 인간을 이해하도록 계도합니다. 문학의 인간 형성 능력은 문학 전공자들의 사회 너머에서도 널리 인정되어 온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마사 누스바움은 세계시민성을 육성하는 데는 학생들에게 문학작품을 경험하게 해서 서사적 상상력을 길러주는 일이 불가결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근 한국의 교양교육은 대체로 리버럴 에듀케이션이 아니라 제너럴 에듀케이션 노선을 쫓고 있어서, 한국문학 전공자들은 문학작품 교육을 위해서보다 작문 교육 같은, 범(汎) 학문 기초적 한국어 능력 계발을 위해서 일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어 능력 계발은 물론 한국문학 전공자가 종사할 가치가 있는 분야입니다만 문학작품을 통한 감수력과 이해력 계발은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문학입문 혹은 한국문학고전강독 류의 과목을 통해 교양교육에 참여하는 것은 낡았을뿐더러 바람직하지 않은 관행입니다. 교양교육을 담당하는 한국문학 전공자는 단지 한국문학에 관한 강의를 교양교과 중에 유지하는 일이 아니라 세계시민이든 인류세든 현대의 보편적 관심에 부합하는, 또한 현대 학문의 초분과적 동향을 반영하면서 한국어 창작 및 번역 작품을 가르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교양교육을 하는 사람에게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처지가 못 됩니다. 다만 교양교육자는 그 자신이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 좌담회에 참석하신 선생님들은 모두 교양교육에 종사하고 계시지만 교육하시는 환경이나 담당하시는 과목이 다른 만큼 교양교육의 목적이나 과제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시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제가 지금까지 드린 교양교육 일반에 관한 말씀은 교양교육과 문학교육에 불리한 대학 정책을 만나 고투 중이신 선생님들에게 어쩌면 현안과 멀리 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에 칼리지, 교육원 같은 이름을 가지고 교양교육이 전문화, 제도화되기 시작한 시기에 한 기관의 설계자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의 일단 정도로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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