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력은 없어도, 그랬으면 좋겠어서
: 문학 교양 강의 종사자로서
최희진 (서울대학교)
언제부터인가 내 삶이 엉터리라는 것뿐만 아니라,
너의 삶이 엉터리라는 것도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너라도 이 경계를 넘어가주었으면.
그래서 적어도 도달해야 할 무엇이 있다는, 혹은 누군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 어떤 존재 증명과 같은 것이 이루어지길……
–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뒤표지에서1)
1.
나는 나 자신의 몸이 최소 세 갈래 이상으로 갈라져 있다고 느낀다. 전공 강의를 하는 나, 문학 교양 강의를 하는 나, 글쓰기 교양 강의를 하는 나로 말이다. 이들은 연구자로서의 나로부터 파생되었겠으나 그 접합이 단단하지는 않다. 접합되어 있음에 감사할 일일 것이나 이 접합은 종종 내게 이물감을 불러일으킨다.
전공 강의를 하는 나는 연구자로서의 자신과 그래도 일정 정도 접합되어 있다. 반면 교양 강의를 하는 나-들은 연구자로서의 자신과 접합이 되어 있는 듯, 되어 있지 않은 듯, 늘 접합부가 아슬아슬하게 달랑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슬아슬한 느낌이 이물감에 가까워질 때면 일없이 아득해져 무력한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면, 평론 활동을 했다면 문학 교양 강의를 지금보다는 수월하게 다루었을까. 문학 교양 강의는 비교적 최근의 문학까지 아우를 것을 알게 모르게 요청받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평론 활동을 하지 않는다. 내게는 그런 능력은 없다.
내게는 그런 능력은 없다. 이 말은 사실 평론의 능력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희한하게도 강의를 하는 일은, 내게 어떠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보다 없다는 사실을 주로 감각하게 하는 일이었다. 감각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듯 그것은 머리로 깨달아지기 이전에 온몸으로 감각되는 것에 가깝다. 나는 무엇이 부족하구나, 무엇을 못하는구나, 나는 무엇을 할 수 없구나. 그 감각들은 강의평가의 시간이 아니라 강의 준비의 시간, 강의 진행의 순간, 강의 전후 문의 응대의 순간 등에 찾아온다.
나는 노동자이므로 좀더 뻔뻔해져도 된다고 생각해보려 하는 날도 많다. 그러나 기초교양도 아니고 전공도 아닌 문학 교양 강의에, 무언가를 기대하며 수강신청 버튼을 눌렀을 수강생들의 면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의 시간과 노력을 내가 분명히 점유하고 있다는―그러므로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나를 붙든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문학 교양 강의는, 철저히 내 시간인 동시에 그 어느 부분도 내 시간이 아닌 것 같다.
왜 이 시간은 나의 시간일 수가 없는가. ‘내가 모자라기 때문’ 말고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아래의 이야기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한 고민이다. 또는 그 이유에 대한 짐작이다.
2.
학생들을 문학 교양 강의에 발 들이게 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다. 한 달에 일정 금액 이상을 서점에 꼬박꼬박 갖다 바치는 출판사의-기둥-꿈나무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발을 디디는 경우부터, 무엇인지 몰라도 대학생이라면 책은 읽어야 하겠는데 영 책을 안 읽어서 강제로라도 책을 읽기 위해 발을 디디는 경우. 에브리타임이든 어디에서든 떠도는 이야기를 통해 (강의자는 알 수 없는) 강의평가를 보고 온 경우부터,2) 강의시간과 강의실이 편해 보여서 아무런 정보 없이 들어온 경우. 이곳에서는 학번과 전공만 천차만별인 것이 아니다. 구성원의 학번이나 전공만큼이나 구성원들의 수강 동기를 종잡을 수 없다. 글쓰기와 같은 필수 교양에 비해서는 학습 동기가 분명한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나, 그 속에서도 이들의 동기는 전공만큼 뒤죽박죽이다.3)
뒤죽박죽인 것은 동기만이 아니다. 살아온 시간 동안 이들이 쌓아온 배경지식 및 독해의 경험도 천차만별이다. 현대시 읽기 교양 강의에서 1980년대 이후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다루기로 마음먹은 학기가 있었다.4) 이 학기에 같이 읽는 시집의 시작으로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1989)을 골랐다. 해당 강의는 종반부에 2020년대의 작품들까지 다룰 계획이었기에, 후반부로 갈수록 학생들에게 낯선 시인이 등장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교과서에서 봤을 법한 시인으로 친근하게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기형도를 첫 시인으로 내세웠는데, 그 학기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말 리포트 한 편을 받아 보았다. “교수님, 저는 기형도 시인이 초면입니다”.
학생은 과학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말했다. 과학고등학교에서는 수능이나 모의고사를 준비하지 않는다고 한다. 국어 과목은 일주일에 3시간밖에 배정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문학은 오직 단 한 학기(2학년 1학기)만 배웠다고 학생은 적었다. 그러니까, ‘다른 시인은 몰라도 기형도 정도는 알겠지’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소외시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강사가 모든 수강생들을 포용하여 안고 갈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교양 강의는 종종 이러한 식으로,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나 자신의 능력 없음을 자책하게 할 때가 있다.
이 이야기는, 문학 교양 강의는 결국, 천차만별의 인생을 살아낸 이들을 어떻게든 끌어안는 작업에서부터 출발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들을 다 품어낼 수 있는가. 15학번부터 25학번까지. 국어국문학과 전공 4학년 졸업반부터 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한 전기·정보공학부 새내기까지. 현재 시중의 서점에 쏟아지는 시들을 좀더 깊이 읽게 읽어보고 싶다는 수강생부터 정지용 시대의 시만이 진짜배기 시라는 수강생까지. 기형도는 너무 오래된 시인이라 진부하다는 수강생부터 기형도가 초면이라는 수강생까지. 나는 정말 그들을 다 품어낼 수 있는가. 내가 읽고 아는 문학이라는 것을 배반하지 않고서도 나는 그것을 해낼 수 있는가.
내게는 그런 능력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한 명의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종종 무겁게 여겨질지라도 나는 나 자신에게 그것을 자주 요구한다. ‘저들은 돈을 내는 사람이고 나는 돈을 받는 사람이니까.’라고 이야기하며 혼자 킬킬대고 웃는 날도 있다. 그러나 농담과 웃음으로 지워낼 수 없는 쓸쓸함, 또는 출처 불명의 책임감이 사실은 남아있다. 기실은 그것이 저 무거운 요구의 근원일 것이다. 수강생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거나 읽고 있으면 너의 삶이 엉터리라는 것도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날도 있기 때문이다. 그걸 한귀로 넘겨버릴 능력마저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3.
내게는 그런 능력은 없다. 이 능력 없는 이를 어떻게든 도와주는 것은 사실 위 이야기의 반면이다. 천차만별의 인생이 이곳에 와 있는 덕분에 천차만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역시 문학 교양 강의이기 때문이다. 17학번 선배가 24학번 새내기의 인생 고민에 조언을 들려준다. 인문학의 역할에 고민하고 있는 사범대학 학생의 옆에서 ‘chatGPT를 잘 키워서 chatGPT에게 마음을 만들어주는 것이 목표인’ 친구를 둔 컴퓨터공학부 학생이 대답한다. 내게 그런 능력이 없으므로, 모든 인생을―하물며 이제는 조금씩 세대의 차이도 지기 시작하는― 다 품어낼 능력이 없으므로 나는 수강생들의 이야기에 기댄다.
수많은 인생들을 카운터칠 수 있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다. 수많은 다른 인생들이다. 내 인생도 그들의 것과 같이 그저 하나의 인생일 뿐이라,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없는 나는 그저 자리를 만든다. 같이 읽어볼 수 있는 재료를 주고, 편히 이야기할 수 있도록 토론의 물꼬를 터준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서로를 위해 서로의 인생을 조각내어 나누어준다. 특정한 시 구절 앞에서의 머뭇거림, 한쪽이 갖지 못한 전공 지식, 성공한 입시, 실패한 연애, 아직 겪는 방황, 어떠한 기억, 그 외의 조언, 더러는 인스타그램 ID, 내가 줄 수 없는 것들을 그들은 서로 주고받는다. 그러니 이 시간은 나의 시간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그 시간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들은 서로의 무언가를 나누어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럼 나는 혹시, 할 수 있던 것도 하나쯤은 있었던 건 아닐까?
4.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교양 수업이기에 나 자신의 능력 없음을 한하게 되는 것도 있지만, 교양 수업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있다고 믿고 싶기도 하다. 그걸 스스로 믿기 위해 이 글을 쓴 것도 같다. 현실적인 모든 여건들 속에서도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미 세 개로 갈라진 몸일지언정 능력 없음의 감각에 짓눌려 죽지는 않기 위해 말이다.
한 명의 노동자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인생에 무언가의 자국을 남길 수도 있는 교사로서 내가 살아 있기 위해, 나는 그걸 믿어야만 한다. 믿겨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 믿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도 있다고. 너라도 이 경계를 넘어가게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이 글은 그저,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쓰였다. 그것만은 진심이다. 내게 남아있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다만 믿음에 불과할지라도.
[2] 학기 말에 각 학교의 공식적인 시스템 속에서 강의평가를 전달받기는 한다. 그러나 학생들이 학생들끼리 공유하는 강의평가는 그것과는 어떻게든 다른 것으로 짐작된다.
[3] 매 학기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간단한 주관식의 설문조사를 진행한다. 이 수업에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항상 마지막에 던지는데, 그에 대해 읽어온 그간의 답변들로부터 내린 결론이다.
[4]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된다. 흔히 교과서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시인들의 시를 다루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꽤 ‘문학적인’ 일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중고등학교와 다른 대학 교육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