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하는 마음] 확실할 수도, 확신할 수도

확실할 수도, 확신할 수도

장기영 (연세대학교)

쓰기의 시간, 필자의 생각 안팎을 자유분방히 떠돌았던 말들이 글의 꼴을 갖추어야 하는 시간이다. 산재된 생각들은 명료한 주제 의식을 전달하기 위하여 축약되거나 소거되거나 더 적확한 말들로 대체되어야 한다. 효율적인 꼴들을 고민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오독을 줄이기 위한 쓰기 장치와 시도들이 개발되면서 쓰기는 어느 새 ‘좋은 글’에 대한 지망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 지망은 다시 쓰기를 효율화한다.

최근 나는 필자로서도 글쓰기 교육자로서도 글꼴에 대한 집착을 의식적으로 낮추고 있다. 말하자면, 쓰이고 난 뒤의 ‘글’보다는 ‘쓰기’라는 행위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결과 중심에서 과정 중심으로의 글쓰기 교육이 필요하다, 는 지난한 말을 반복하자는 게 아니다. 글쓰기 수강생들은 자신이 쓰고 싶었던 글의 꼴과 닮아갈수록 수업에 대한 만족도를 높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글의 꼴을 정교하게 가르칠수록 그것‘만이’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글의 전부라고 생각하게 되는 일이 두려운 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물(産物)이 중요도 높게 매겨질수록 산(産)은 자꾸 ‘과정’이 된다. 글쓰기 교육에서 ‘글’에만 집중할 경우, 즉 잘 쓴 글, 좋은 글이 무엇인지에만 천착할 경우, 쓰기는 좋은 글을 써내기 위한 과정이 된다. 잘 쓰는 이들을 상정하고, 잘 쓰는 과정을 체계화하는 일은 곧 쓰기를 ‘의도’와 ‘실천’이란 단어로 믿음직하게 각색해낸다. 필자가 전하려는 메시지,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표현. 그러나 좋은 글은 정말 유능한 필자가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했기에 존재 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그 잘 쓰기의 표본들을 ‘잘’ 따라하기만 하면 누구든 잘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이를 잘 따라하지 못하면 잘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인가? 쓰기를 가르치는 일은 정말 ‘잘 쓰기’를 지향하고 있는가(할 수 있는가)?

쓰기를 과정으로만 보는 것 자체에의 경계가 필요했다. 전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만을 주요하게 추출하고, 그 주변을 배회하는, 혹은 잠재하는 생각 뭉치들을 명료한 흐름으로 정리하는 일, 그리고 그 흐름의 길목마다 적합한 이음새들을 기워내는 일. 나는 이 잘 쓰기의 세계가 조금 더 걱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망적인 삶과 쓰기에서 어떤 소외가 일어나는지를 말하고 싶어서이다. 

그런데 앞서 나는 거짓말을 하였다. 글꼴에 대한 집착을 의식적으로 낮추‘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진행형의 술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사실상 나는 이를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다. 특히 이 글을 쓸 때가 더욱 그랬다.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으며 주제를 무엇으로 뽑아낼까, 어떻게 그 주제를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였다. 좋은 글을 지망하지 않는 글은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평가를 수행해야 하는 교육 현장에서 쓰기를 과정으로만 환원하지 않는 일 또한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실패의 필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쓰기에, 그리고 쓰기에 대하여 말하는 일에 다소간 기댈 수 있는 점은 이 불확실성을 ‘말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쓰기에 대한 불확실성’을 숨기지 않았던 세 필자를 살펴보자.

일라이 클레어는 1990년 북부점박이올빼미가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 연방 정부, 환경운동가와 생물학자, 그리고 언론에 의하여 집중됨에 따라, 벌목 노동자가 이 일에 따른 “희생자” 혹은 “공범”으로 분석되는 과정을 지적한다. 클레어에 따르면 벌목꾼들은, 희생자로 그려지면 “옳든 그르든 환경운동가들을 마구 몰아세우는 불쌍하고 멍청한 짐승”, 공범자로 그려지면 “목재 산업을 방조하는 충성스런 짐승”1)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이 전개 가능한 전제로, 자신의 글을 읽을 독자들을 “개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나 “있다 해도 관광객의 시점이었을 것” 혹은 “목재 산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상관없이 벌목 노동자를 도살업자, 혹은 심지어 살인자라고 믿을”2) 것이라고 상정함을 밝힌다.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가 탄광 노동자이거나 석유 굴착업자일지도 모른다. 아마 당신을 벌목 노동자이거나 석유 굴착업자일지도 모른다. 아마 당신은 벌목 노동자이거나 어부일지도 모른다. 또는 어쩌면 나처럼 그런 사람들 속에서 자라났을지도 모른다.3)

불확실성을 담지한 서술은 서술자의 무책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무책임에는 사실상 책임감이 서려 있다. 서술자가 모든 것을 알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글에서 섣불리 상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내뱉는 점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감어린 서술이기도 하다. 앨리슨 케이퍼 또한 자신의 책에서 애슐리치료4)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지만, 다시금 이 치료가 “애슐리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지는 명확히 확인할 방법이 없”5)음을, “우리 중 누구에게도 ‘잘’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 따위는 없”음을 상기시킨다. 더 나아가 아래처럼 술회한다.

마치 지난 몇 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우리가 그녀를 분석했던 시기 이후에는 그녀가 계속 살아오지 않았던 것처럼, 나를 포함한 학자들과 활동가들이 과거 애슐리에게 일어났던 일에만 계속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까닭에, 애슐리를 ‘사례연구’로 이용하는 것은 이러한 동결 상태를 악화시킬 따름이었다.6)

불가지성을 토로하던 서술자는 이제 무책임함을 넘어 자신의 초점이 윤리적이지 못하다는 사실마저 자인한다. 에바 키테이 또한 이러한 자인을 삼키지 않았다.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신의 딸 세샤에 대하여 더 많이 말해야 하기에 책에서 자신의 딸을 서술했지만 그는 세샤를 소개한 순간부터 이미 그를 “불공평하게 대했”7)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이 대신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장애를 가진 개인에 대해 말해야 하는 어색한 위치”를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세샤에 관해 말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장애 운동의 격언(우리를 빼놓고 우리에 대해 말하지 말라-인용자 주)을 거슬러 세샤 대신 말해야 한다”8)는 점을 빼지 않고 서술하기 때문이다. 

글이 길어졌다. 쓰는 이, 쓰기를 가르치는 이 모두에게 반드시 당도할 이 어색한 위치들을 ‘글’과 ‘교육’이라는 반듯한 이름으로 가려버리지 말아야 함을 스스로 되뇌기 위한 꽤 어수선한 도정이었다. 명료한 글, 그리고 이것이 가능함을 역설하는 쓰기 교육은 책임질 수 없는 것들마저 책임지려 한다. ‘글의 꼴’을 의식할수록 확신과 확실, 그리고 책임이 대두된다. 꼴을 갖춘 글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에 대한 지향을 끊임없이 말해야 하는 강의실에서는, 문장의 불확실함, 필자의 불가지성, 서술에의 비윤리성이 점점 비가시화된다. 확신할 수 없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 그래서 실은 아는 것이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어쩌면 이미 써온 글들이 누군가를 불공정하게 대해왔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이 자명한 불안과 의심을 부러 건드리는 이유는 죄책감보다는 도리어 책임감을 더 발음하고 싶어서이다. 책임에 대한 복화술은 관두자, 책임감을 가지기 위하여. 


[1] 일라이 클레어, 『망명과 자긍심: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전혜은·제이 역, 현실문화, 2023, 116쪽.
[2] 일라이 클레어, 앞의 책, 118쪽.
[3] 일라이 클레어, 위의 책 118~119쪽.
[4] 1997년에 태어난 애슐리 X(얼굴은 공개됐으나 성은 밝혀지지 않음)는 태어난 지 몇 달 후 ‘정적 뇌병증’ 진단을 받는다. 애슐리의 신체는 빠르게 발달하지만 정신적 발달은 그 속도에 적절히 발달하지 못한다는 점에 의해 그의 부모와 몇몇 의사들은 ‘애슐리치료(자궁절제술, 양쪽 유방절제술, 맹장절제술 등)’를 주장하였다.
[5] 앨리슨 케이퍼,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이명훈 역, 오월의봄, 2024, 175쪽.
[6] 앨리슨 케이퍼, 앞의 책, 178쪽.
[7] “세샤를 공정하게 다루기 위해 먼저 세샤를 소개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나는 세샤를 불공평하게 대했다. 나는 세샤를 장애를 가진 내 딸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세샤는 다른 모두처럼 자기 자신만의 특징을 지닌 사람이자 개인이고, 긍정적인 말들로 표현되어야 하는 이 세계의 존재다. (중략) 누군가는 합리적으로 질문할 수 있다. 왜 세샤는 스스로를 대변하지 않는가?” 에바 키테이, 『의존을 배우다』, 김준혁 역, 반비, 2023, 40쪽.
[8] 에바 키테이, 앞의 책,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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